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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김정일의 장례식에 조문을 했을까요? (비스마르크 평전)을 읽고




강미현의 <비스마르크 평전>을 읽으면서,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만약 비스마르크 라면, 김정일 조문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현재의 한국 보수의 입장에서 북한집단과 손을 잡는 것이 악마적 행위라고한다면,

비스마르크 당대의 관점에서 독일 보수주의자가 혁명의 상징인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협상하는 것

그 자체가 악마적 행위였다고 한다.




1855년, 비스마르크는 파리 박람회를 계기로 파리에 방문했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프랑스 황제 부부를 접견했다.

이같은 그와 나폴레옹 3세간의 만남에 대해,

베를린의 보수단체인 카마릴라는 파리에서의 양자의 만남을 심히 못마땅하게 간주했다.

독일 보수주의의 관점에서, 나폴레옹은 혁명의 상징이었고, 그와 협상하는 것 자체가 악마적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이번만큼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이 거센적도 없었다. 

라이프는 "비스마르크가 갈수록 보수 언론매체인 십자신문 정당의 외교적 입장을 무정부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질타했고,

자이치크는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보나파르트 추종자"로 격하시키기도 했다.



이같은 비난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후에 독일제국의 위대한 총리가 될 비스마르크는

국내의 원칙주의 정치가 외교노선에 어떠한 영향도 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는 보수주의자들과의 결별도 불사했다.

 카마릴라, 특히 절친한 관계인 게를라흐 형제와의 결별도 받아들였다. 


그들의 결별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보수주의자의 비난을 일축했다.


 "나는 프로이센 사람이며, 외교정책에 관한 한, 나의 이상은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롭고

외국에 대한 추종이나 편애라는 인상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다." 


이것은 프로이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가운데 수동적인 정책으로는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호엔촐레른 왕조에 충실한 군주제 지지자였고,

융커 출신의 보수주의자이며,

프로테스탄트의 세계관을 고수한 인물이지만,


그러한 특성들로 인해 편협하고 제한된 외교정책을 정당화시켜야 한다는 주장만은 철저하게 배격하고자 했다.


그는 프로이센의 정치적 목표를 최우선으로 상정했고,

가급적 다각적인 차원에서 유동적으로 현실을 이용하고자 했고,

특히 그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외교관이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스마르크적 관점에서, 국내의 원칙주의 정치가 외교노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고 본다. 


좌파의 외교와 우파의 외교가 따로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북한 외교의 좋은 먹잇감이 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